하면된다! 뼛속가지 다효능 알아보자 무엇이 진실인가? 둥근잔대 해결방법 이정돈 알아야지! 자유주의 후퇴기 너무 좋은데?르다! 권율 총정리

2020. 10. 20. 16:48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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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러시아, 중국에 분포하는 여러해살이풀로 우리나라에는 제주도 한라산의 그늘진 곳에 자란다.
뿌리는 굵으며 끝에서 많은 줄기가 모여 자란다.
줄기는 곧추서며 높이 15cm쯤으로 전체에 털이 없습니다.
잎은 어긋나며, 난상 원형 또는 원형으로 잎자루는 거의 없습니다.
꽃은 7-8월에 하늘색으로 피고 줄기 끝에 1개 또는 2-3개가 총상꽃차례로 달린다.
꽃받침잎은 피침형, 꽃부리는 종 모양으로 끝이 5갈래로 갈라진다.
열매는 삭과다.
뿌리, 어린잎과 줄기를 나물로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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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란 굴레 속에서 1870년 초에 독립한 독일이나 이탈리아 등이 점차 산업 혁명의 과정들을 쉽게 극복하며 급속하게 영국의 독점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상 이때부터 영국은 자유주의 깃발 아래 마음껏 누렸던 제국주의가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국내에도 영향을 미쳐 1875년경에는 전 유럽 국가들이 모두 산업 혁명의 영향 아래에서 대량 생산을 하자 과잉 생산에 의한 심각한 경제 공황이 일어나게 되었다.
경제 공황 중에 영국에서는 하인드먼(Hyndman, H.
M.
)이 사회 민주주의 연맹을 창설함으로써 사회주의가 생겨난 이후, 로버트 오언은 공상적 사회주의를, 러스킨(Ruskin)은 심미주의적 사회주의를, 그리고 페이비언 협회(Fabian Society)의 버나드 쇼(Bernard Show)나 웨브(Webb) 부부는 산업 자본가보다 대지주를 공격하는 지성적이고 기회주의적 사회주의를 그려 나갔다.
또한 맥도널드(MacDonald, J.
R.
)는 노동자와 비국교도인 소시민을 포섭하여 정서적이고 복음적인 사회주의를 만들어 나갔다.
한편, 영국의 19세기 후반 대외 정책을 보면 유럽에서는 솔즈베리 수상에 의해 이루어진 지중해 협상(1887년)으로 인해 1870년대부터 국제 외교의 위용을 나타내던 비스마르크의 동맹 체제를 잠재우고 영국의 기존 외교 정책이었던 세력 균형책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아시아에서는 문제가 달랐다.
1890년대 들어서면서 유럽의 각국들이 아시아에서 각축을 벌이면서 이미 세력을 장악하고 있던 영국을 위협했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중국이었다.
여기에서 영국은 각국들의 움직임을 접하며, 이전처럼 자신의 이득과 관련한 고립 정책을 표명하면서 이들을 조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특히, 이러한 전통적인 고립 정책을 주장한 사람은 바로 19세기 말의 영국의 외교 정책을 거의 주관했습니다시피 한 솔즈베리 수상(1885~1886, 1886~1892, 1895~1902년)이었다.
솔즈베리는 '만일 영국이 고립 정책을 포기합니다면 어떤 나라와 동맹을 맺어야 하는데, 그러면 영국이 그동안 평화를 유지해 오던 상황이 깨져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더욱더 고립 정책을 고수했습니다.
그리고 1895년 캐나다의 재무장관인 포스터가 의회에서 쓴 '위대한 고립(Splendid Isolation)'이란 단어가 '타임스' 지를 통해 영국인들에게 전해지고, 또 거기에다 고센 해군 제독은 "영국은 힘이 없어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힘이 있기에 스스로 고립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라고 말함으로써 솔즈베리와 영국민들의 마지막 사기를 북돋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양자강 주변 지역들이 열강에게 모두 잠식됨에도 불구하고 고립을 주장하던 솔즈베리는, 미 국무장관 헤이(Hay, J.
)의 문호 개방 선언(1899년), 보어 전쟁, 중국에서의 의화단 운동(the Boxer Rising, 1900.
6), 그리고 10만 러시아 병력의 만주 투입(1900.
8)으로 극동에서의 러시아에 대한 무방비 상태 등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이 결국 고립 탈피를 주장하는 체임벌린 식민상이나 1900년부터 외무장관이 된 랜즈다운 등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자유주의를 완성하고 절정까지 맛본 영국이 19세기의 자유주의를 더 이상 지킬 수 없는 현실 속에 놓여 있음을 20세기로 넘어 가면서 영국 스스로가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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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贈) 효충 장의 협력 선무공신(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 대광 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영가 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永嘉府院君) 자헌대부 의정부 우참찬 팔도 도원수(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八道都元帥) 권공(權公)의 묘소에 세울 비석이 갖추어지자 우의정(右議政) 신흠(申欽)이 다음과 같이 비문(碑文)을 썼다.
공이 왜적(倭賊)을 토벌한 공적은 간이(簡易) 최입(崔岦)공이 행주(幸州)에다 기록하였고 공의 아름다운 사행(事行)은 공의 사위 오성(鰲城, 오성 부원군) 이항복(李恒福) 정승이 묘지(墓誌)에다 기록하였으므로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옛날의 전장(典章)을 돌아보건대, 공처럼 위대한 충렬(忠烈)은 명법(銘法)에 들어맞으므로 명법에 있어 마땅히 묘역(墓域)에 표시하여 후세에 보여야 할 것입니다.
공의 휘(諱)는 율(慄)이고, 자(字)는 언신(彦愼)입니다.
공의 먼 윗대 선조 권행(權幸)은 신라(新羅)의 종성(宗姓)으로서 견훤(甄萱)을 토벌하여 공로를 세우자 고려 태조(高麗太祖)가 권씨(權氏)의 성을 하사하고 안동(安東)에다 봉해 주었는데, 자손들이 그곳을 관향으로 삼았습니다.
그 뒤 12대를 지나 권부(權溥)에 이르러 다시 복록을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한 가문에 봉군(封君)이 9명이나 되었다.
3대를 지나 권근(權近)에 이르러 찬성(贊成)의 벼슬을 하였는데, 이분이 공의 6대조입니다.
증조 권교(權僑)는 양근 군수(楊根郡守)이고, 할아버지 권적(權勣)은 강화 부사(江華府使)이며, 아버지 권철(權轍)은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으로 네 조정을 두루 섬겨 태평 시대의 재상이 되었다.
어머니 조씨(曺氏)는 적순 부위(迪順副尉) 조승현(曺承睍)의 따님으로 하성 부원군(夏城府院君) 조익청(曺益淸)의 후손인데,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정유년(丁酉年, 1537년 중종 32년)에 공을 낳았습니다.
공은 어렸을 때 놀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장성하자 사치의 습관이 없었으므로 의정공이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우리 가문에 사람이 있습니다.
”고 하였습니다.
공이 경서(經書) 공부를 매우 부지런히 하였으나 젊어서는 어물거리며 지체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않다가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임오년(壬午年, 1582년 선조 15년)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 46세였으므로 식자(識者)들은 더러 장상(將相)의 그릇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승문원(承文院)의 정자(正字), 저작(著作), 박사(博士)를 거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하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예조 좌랑(禮曹佐郞), 호조 정랑(戶曹正郞), 전라 도사(全羅都事), 경성 판관(鏡城判官)을 역임하였습니다.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에 다시 호조 정랑에 임명되었다가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승진되었고, 이듬해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 봄에 어떤 사건으로 인해 파직되었다.
그해 여름에 일본(日本)의 추장 수길(秀吉)이 명(明)나라를 침략하고자 수가(秀嘉), 행장(行長) 등 무리 60만을 보내어 우리나라를 침략하니,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선조(宣祖)가 하교(下敎)하기를,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권율은 재주가 있습니다 하니, 시험해 보아야겠다.
” 하고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임명하였는데, 공이 곧바로 올라와 사은 숙배(謝恩肅拜)하였습니다.
왜적이 조령(鳥嶺)을 넘어 충주(忠州)를 함락하여 순변사(巡邊使) 신입(申砬)이 맞서 싸우다가 죽으매 왜적이 계속 밀고 올라와 도성을 육박하자 선조가 서쪽으로 피난갔다.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이광(李洸)이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윤국형(尹國馨),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김수(金睟)와 같이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진위(振威)에 이르렀는데, 이광이 보좌 장수들에게 대책을 묻자 공이 말하기를, “주공(主公)께서 경내(境內)의 병력을 남김없이 동원하여 왔으니, 나라의 존망(存亡)이 이번의 거사에 달렸습니다.
지금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곧바로 수원(水原)으로 향하여 통진(通津)을 거쳐 조강(祖江)을 건너 임진(臨津)을 차단하고 행재소(行在所)의 명을 받는다면 아군(我軍)이 형세를 얻어 대사(大事)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고 하였으나 이광이 따르지 않아 왜적을 보기도 전에 붕괴되어 버렸다.
공이 광주로 돌아와 분연(奮然)히 말하기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폐허가 되고 주상(主上)이 피난갔는데, 신하로서 어찌 앉아서 나라가 망하기를 기다릴 수 있겠는가?” 하고 인근 고을에 격문(檄文)을 보내어 1천 5백 명의 병사를 얻어 이치(梨峙)로 나아가 주둔하고 호남(湖南)과 영남(嶺南)의 요충지를 진압하였습니다.
그러자 영남의 왜적이 금산(錦山)의 왜적과 힘을 합쳐 공격해 오므로 공이 칼을 들고 나아가 앞장서서 싸우자 여러 장수들이 서로 말하기를, “선비도 이런단 말인가?” 하고, 사기(士氣)가 백배로 치솟아 영하(嶺下)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조정에서 공을 큰 군영에다 시험해 보려고 하여, 그해 가을에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임명받아 부임하기 전에 전라 관찰사 겸 순찰사(全羅觀察使兼巡察使)로 승진되었다.
공이 임명을 받은 후 통곡하고 나서 전주(全州)의 병력을 대대적으로 선발하여 스스로 정병(精兵) 1만 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올라와 수원(水原)의 독성(禿城)에 웅거하여 확고한 진지를 구축한 뒤에 도성을 위협하고 곧바로 서로(西路)를 흔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수가는 허점을 찌를까 두려워하고 행장은 뒤를 공격할까 염려하여 마치 물을 막는 것처럼 방비하고 관서(關西)에 눌러 앉으려고 마음을 굳히었다.
선조가 급히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공에게 상방검(尙方劍)을 하사하고 이르기를, “장수들이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이것으로 참수(斬首)하라.
” 하고, 또 여러 진영(陣營)의 의병(義兵)으로 하여금 모두 공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도성(都城)에 있는 왜적이 자신들의 수미(首尾)가 떨어질까 걱정한 나머지 수만 명의 병력을 삼진(三陣)으로 나누어 왕래하면서 도전(挑戰)하였으나 공은 진영을 굳게 지킨 채 대응하지 않고 가끔 기병(奇兵)을 출동하여 기세를 꺾었다.
이렇게 5일 동안 버티자 왜적이 군영을 불태우고 도망갔으며, 경기(京畿)의 왜적들도 병력을 거두어 도성으로 들어갔다.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에 독성에서 양천(陽川)으로 군영을 옮기고 병력을 나누어 포진한 뒤에 곧바로 양천강(陽川江)으로 진격하여 성 서쪽 안현(鞍峴)에다 진지를 구축하려고 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극력 만류한 바람에 고양(高陽)의 행주산(幸州山)에다 진영을 구축하였습니다.
기세가 한창 치성한 도성의 왜적이 고단한 군사를 이끌고 깊숙이 들어온 공을 보고 2월 20일에 왜적이 정예 병력을 모두 동원하여 두 갈래로 나누어 밤에 행주 성채(城寨)를 공격하였습니다.
공이 일어나 보니, 적의 칼날이 들판을 뒤덮었고 성채를 몇 겹으로 포위하였습니다.
공이 곧바로 사졸들에게 밥을 먹이게 한 다음 활 잘 쏘는 자를 골라 성첩(城堞) 사이에 벌려 세워 비 오듯이 화살을 쏘게 하는 한편 또 역사(力士)를 선발하여 돌을 던져 공격하고 이어 거자포(車子砲)를 발사하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왜적이 아홉 번 진격하였습니다가 아홉 번 물러갔다.
이윽고 왜적이 풀을 묶어서 불을 붙이고 함성을 지르며 성채로 올라오자 공이 상방검을 들고 서서 장수들을 독려하니, 장수들이 앞다투어 싸우니 적병의 기세가 드디어 꺾이었다.
왜 적의 장수와 군사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죽었고 군수품(軍需品)을 버리고 달아났는데, 1백 30여 명의 왜적을 참수하였습니다.
조정에 승전(勝戰)을 보고하자 공은 특별히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승진시키고 여러 장졸들은 공로에 따라 상을 주었다.
명(明)나라 유격(游擊) 사대수(査大受)는 공을 찾아와 보고 감탄하기를, “외국(外國)에도 명장(名將)이 있습니다.
” 하였고,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은 공문을 보내어 격려하기를, “권 포정(權布政, 권율)은 난리 속에 충신(忠臣)이고 중흥(中興)의 명장(名將)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고 하면서 비단과 백금(白金) 등의 물품을 상으로 주었다.
그리고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은 아뢰기를, “배신(陪臣) 권율이 외로운 성을 혼자 지키면서 강경한 적을 막았습니다.
”고 하니, 천자(天子)가 가상히 여겨 말하기를, “전라도(全羅道)에서 왜적을 많이 참수하였으니, 그 나라 백성들의 기세가 진작되겠구나.
”라고 하였습니다.
공이 행주의 적을 유린하고 파주(坡州)로 군영을 옮기었다.
파주는 서쪽으로 연이어진 큰 도로였으므로 왜적이 꺼리었으며, 또 행주의 패배를 보복하고자 짐승의 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공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결국 감히 오른쪽으로 발을 들여놓지 못하였습니다.
4월에 도성의 적이 도망가자 공이 날랜 군사로 추격하려고 하였는데, 그때 마침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계책을 써서 적을 물리치려고 공이 남하(南下)하지 못하도록 저지하였습니다.
6월에 제도 도원수(諸道都元帥)에 임명되어 영남(嶺南)에 주둔하였고 그해 겨울에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었다가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전직되었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 봄에 병환으로 사직하자 선조가 염려하여 문병하는 의관(醫官)이 길에 줄을 이었다.
수자리를 이탈하여 전주(全州)에 숨은 어떤 무사(武士)를 공이 참수하였는데, 체찰사(體察使)가 그 집안사람의 하소연을 받아들여 공에게 처벌을 내릴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공이 파직되어 웃으며 말하기를, “몇 년 동안 장수로 있으면서 군법(軍法)으로 하나의 병사를 참수하지 못한단 말인가?” 하고 세상일을 사절한 채 강화(江華)의 옛 마을로 돌아갔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사면을 받아 한성 판윤(漢城判尹), 호조 판서(戶曹判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임명되어 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여 임금 앞에 입시(入侍)하자 선조가 하교하기를, “경(卿)이 아니면 국가가 어찌 오늘날에 이르렀겠는가?” 하고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였습니다.
병신년(丙申年, 1596년 선조 29년)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임명되었을 때 선조가 도원수(都元帥)로 임명하고 말하기를, “경(卿)은 충성의 공로가 성대하고 용맹과 지략이 뛰어나 천하에 이름이 알려지고 위엄이 적국(敵國)을 놀라게 하였으니, 원수(元帥)의 직책을 경 말고 그 누가 맡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하직 인사를 드리자 선조가 불러 보고 술을 주어 위로하는 한편 또다시 내구마를 하사하였습니다.
7월에 호서(湖西) 토박이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켜 연달아 다섯 고을을 함락하자 조정에서 공으로 하여금 토벌하도록 하였습니다.
공이 군사를 이끌고 급히 달려갔는데, 적이 이미 홍주(洪州)에서 붙잡혀 죽었으므로 그의 잔당(殘黨)을 다스려 처벌한 내용을 올려 매우 명확하게 하자 호서가 안정되었다.
그해 겨울에 일본에서 돌아온 우리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청정(淸正)이 재차 침범하려고 합니다.
”고 하자 조정과 재야가 술렁거렸는데, 공이 말하기를, “설령 청정이 또다시 온다고 하더라도 대처할 도리가 있을 것입니다.
머리를 맞대고 걱정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고 상소를 올려 진영을 나열하여 적병을 제어하는 계책을 개진하였습니다.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 가을에 과연 왜적이 재차 침략하여 진주(晉州)와 남원(南原)을 함락하고 곧바로 경기(京畿)로 향하였습니다.
공이 적병과 싸우다가 행군하면서 참수한 적의 숫자를 보고하였습니다.
공이 부름을 받고 조정에 올라오니, 공에게 한진(漢津)의 방어를 의뢰하였습니다.
조정에 돌아온 지 그 이튿날 곧바로 명나라 장수 팽우덕(彭友德)과 같이 강을 건너 직산(稷山)에서 왜적과 싸워 크게 깨뜨렸다.
그해 겨울에 명나라에서 병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제독(提督) 마귀(麻貴),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보내어 울산(蔚山)의 왜적을 공격하였습니다.
공이 무리를 이끌고 먼저 공격하였는데, 돌격하는 기마병이 앞을 지나갈 때 맨 뒤에 출발한 자의 머리를 베어 군사들에게 보이자 군사들이 약진하여 개미떼처럼 붙어서 올라가 외성(外城)을 함락하니, 제독과 경리가 번갈아 칭찬하였습니다.
무술년(戊戌年, 1598년 선조 31년) 봄에 병환으로 면직(免職)해 달라고 요청하자 선조가 위로하고 달래어 힘써 만류하였습니다.
명나라에서 병부 상서(兵部尙書) 형개(邢玠)를 파견하여 세 명의 제독을 독려해 세 갈래로 나누어 왜적을 공격하였는데, 공은 유정(劉綎)을 따라 순천(順天)의 왜적을 공격하였습니다.
유정이 본래 전쟁할 마음이 없어 머뭇거리고 진격하지 않으면서 공이 여러 번 계책을 건의하였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왜적이 수군 도독(水軍都督) 진인(陳璘)에게 대패(大敗)를 당하고 그들의 추장 수길(秀吉)이 죽자 여러 곳의 왜적이 모두 철수해 돌아갔다.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년) 여름에 공의 병환이 위독하여 벼슬을 사양하자 선조가 윤허하였는데, 7월 6일에 결국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선조가 매우 애통해 하여 조회를 중지하고 관례보다 부조를 더하는 한편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찬성(贊成)의 벼슬을 추증하라고 명하였습니다.
9월에 양주(楊州) 홍복산(洪福山) 술좌(戌坐)의 자리에다 장례를 치렀는데, 선영(先塋)의 아래였다.
그 뒤 7년 후 을사년(乙巳年, 1605년 선조 38년)에 공로를 논하여 선무 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에 기록하고 영의정(領議政)과 부원군(府院君)을 추증하였습니다.
공의 전 부인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첨정(僉正) 조휘원(曺輝遠)의 따님인데, 온화하고 씩씩하며 후덕한데다 부녀자의 법도가 있었습니다.
나이 24세에 세상을 떠나 정경 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고 1녀를 두었는데, 사위는 바로 오성공(鰲城公, 오성 부원군 이항복)입니다.
오성공이 2남 1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이성남(李星男), 둘째 아들 이정남(李井男)은 모두 음덕으로 군수(郡守)의 벼슬을 하였고 딸은 윤인옥(尹仁沃)에게 시집갔다.
이성남은 처음에 판서(判書) 권징(權徵)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고 나중에 주부(主簿) 김계남(金繼男)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4녀를 낳았습니다.
이정남은 승지(承旨) 윤의(尹顗)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습니다.
윤인옥은 1남 1녀를 낳았습니다.
공의 후 부인 박씨(朴氏)는 죽산(竹山)의 유명한 씨족 현령(縣令) 박세형(朴世炯)의 따님인데, 총명과 은정이 있었으며 법도를 견지하고 시어머니와 공을 한결같이 순종으로 받들었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미망인(未亡人)으로 자처(自處)하였고 절제(節祭)나 시제(時祭)를 지낼 때 모두 예절에 따라 하였는가 하면 때때로 의복을 만들어 제전(祭奠)에 올렸다가 불태웠다.
공보다 10년 뒤 무신년(戊申年, 1608년 선조 41년) 2월에 향년 62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정경 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다.
그해 4월에 공의 곁에 묻히었다.
후 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여 공이 중형(仲兄, 권순(權恂))의 아들 권익경(權益慶)을 후사로 삼았는데, 권익경은 음덕으로 현감(縣監)에 보임되었다.
권익경은 처음에 이광륜(李光輪)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았는데, 큰아들 권집(權)은 무과(武科) 출신으로 현감이고 둘째 아들은 권입(權岦)이고 셋째 아들은 권업(權嶪)입니다.
나중에 이정(李凈)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권헌(權巘)이고 딸은 이도기(李道基)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어리다.
권집은 2남 1녀를 두고 권업은 1남을 두었으며, 이도기는 1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공은 신장이 팔척(八尺)에다 용모가 풍만하였는데, 안색이 엄중하고 행실이 충실하였습니다.
부모 형제에게는 온순하고 화락한 기색으로 대하였고 상례(喪禮)에 슬퍼하거나 제사에 정성을 쏟는 바가 한결같이 진심에서 나왔으며, 종족을 대우함에 있어 모두 환심을 다하였습니다.
성품이 베풀기를 좋아하여 집안에 남은 물건이 없었고 처사에 주밀하여 거행할 때 반드시 만전(萬全)을 기하였습니다.
적진과 대치할 때 언행(言行)이 차분하였습니다.
원수부(元帥府)에 대장기(大將旗)를 세우고 재차 군영(軍營)을 통솔할 때 병사들의 앞에 서서 명령이 엄숙하자 장병(將兵)들이 추종하여 계책이 시행되어 전공이 이룩되고 대적(大敵)을 깨뜨려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대적하였으니, 비록 옛날의 명장(名將)이라도 따라가지 못할 점이 있었습니다.
명나라 상서(尙書) 석성(石星)이 우리나라의 사신을 만나면 공의 안부(安否)를 묻고 말하기를, “그대의 나라에 권공과 같은 사람이 몇 명만 있으면 무엇을 걱정하겠는가?”라고 하였고, 왜인(倭人)도 우리나라의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권 원수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보았으니, 이처럼 중화(中華)나 오랑캐들의 감복을 받았습니다.
공이 군중(軍中)에 있을 때 성지(聖旨)와 명나라 공문을 손수 기록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 의정(李議政, 이항복)이 나의 묘지(墓誌)를 써 줄 것이니, 이것으로 족합니다.
”고 하였습니다.
임무를 벗어버리자 강화(江華)의 고향에다 서재(書齋)를 지어 놓고 만취당(晩翠堂)으로 호를 붙였는데, 그의 뜻을 붙인 것이었다.
아! 신흠(申欽)은 공이 원수로 있을 때 보좌관이었다.
공은 우경(虞卿)처럼 백벽(白璧)을 받는 지혜1)가 있으나 나는 중랑장(中郞將)이 지은 황견(黃絹)의 문장2)이 없는데, 일찍이 다음과 같이 평론하였습니다.
높은 산 깊은 숲속에 용과 호랑이처럼 변화하는 사람은 바로 공입니다.
그런데 분양왕(汾陽王) 같은 공로를 세우고도 중서령(中書令)에 오르는 고공3)(考功)을 받지 못하였고 진국공(晉國公) 같은 덕망을 지니고도 녹야당(綠野堂)에서 즐기는 낙4)을 누리지 못하였으니, 이점이 개탄스럽다.
그러나 절조(節操)를 지켜 신명을 바치면서 일신(一身)에 국가의 안위(安危)를 걸머졌으므로 단서 철권5)(丹書鐵券)을 시종 영원히 보존한 것은 족히 (분양왕ㆍ진국공) 두 분과 짝할 만합니다고 하겠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지난날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 무렵에 무지한 저 오랑캐들이 흉악한 음모 품어 왔도다.
이리저리 충돌하고 날뛰는데 그 누가 죽이고 제거하랴? 우리 강토[箕封]에 만연했도다.
임금님 탄식하고 말하기를 그 누가 아군을 지휘하나 그의 재주 시험하려 했네.
권공이 그 중책 인수하여 팔도의 병력을 총괄하고 꺼진 불 재차 살렸도다.
행주(幸州)에서 적의 기세 꺾어 강맹한 적을 크게 제거했고 직산(稷山)과 울산(蔚山) 전적 대단했도다.
좌우 수륙(水陸)에서 접전하며 목 누르고 등 후려치니 우리에게 덤비지 못했도다.
도성이 다시 회복되어 행차 길 환히 열렸으니 권공이 세운 공로이도다.
사람의 모사(謀事) 성공하고 귀신(鬼神)도 함께 도와주니 권공이 세운 계책이도다.
그 영령 찬란히 빛나고 그 명성 대단히 높으니 권공의 행한 미덕(美德)이도다.
묘역(墓域)의 산악이 드높고 묘역의 비석 우뚝 서니 권공이 그곳에 묻혔도다.
권공의 막하 보좌관이 공적을 모두 들추어내어 묘역 남쪽에 비명(碑銘) 세우도다.